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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뜨겁다

능산선생 2006. 2. 2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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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뜨거움을 정도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집단적인 차원에서도 그렇다. 가령 우리는 물불 안 가리는 막무가내의 열정을 이상적이고 순수한 사랑의 징표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하다. 불 같은 사랑이라야 진짜라고 생각한다. 불처럼 뜨거운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불처럼 뜨겁지 않은 사랑이 가짜라고 매도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화끈한 성격이라는 게 자랑이고 끝장을 본다든지 뒤끝이 없다는 게 칭찬이다. 물론 그게 자랑일 수 없고 칭찬이면 안 된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것과 반대의 성격, 그것과 다른 생활 태도를 고쳐야 될 대상인양 취급하는 분위기이다.
 
뜨거움에 대한 신봉은 집단적 영역에서 한층 강렬하다. 2002년 월드컵 때의 거리 응원은 뜨거움에 동참하는 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세계에 알렸다. 그보다 먼저 우리에게 뜨거움의 의의와 보람을 일깨워 준 사건은 아마도 일련의 민주화 과정이었을 것이다. 광장에 몰려들어 어깨동무를 하고 살내음과 땀내음 속에서 동류의식을 느끼고 함성을 목청껏 외치던 경험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불 같은 열정, 뜨거움에 대한 신봉

그리고 이제 우리는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가는 일에 익숙하다. 어떤 사안이 생기면 나라 전체가 들썩거린다. 인터넷은 불이 붙는 순간부터 뜨거워질 때까지의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했다. 아주 지엽적이고 작은 사건도 여기저기서 불쏘시개를 갖다대면 금방 큰 불이 되어 활활 타게 된다.
 
빨리 뜨거워진만큼 빨리 식는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이치이다. 이쪽으로 우루루 쏠리다가 저쪽으로 우루루 달려간다. 온 나라가 판교로 쏠리다가 황우석으로 몰리다가 사학법을 들고 여기저기서 부딪친다. 방송에서 건강에 무슨 식품이 좋다고 하면 그날 당장 그 식품이 동이 난다. 세상이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한다.
 
뜨거움의 참된 문제는 뜨거움 자체에 참여하는 순간 사안의 전체적 성격을 차분히 따져 볼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린다는 것이다. 불은 타오르고 태운다. 분별력 없는 것이 불의 속성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과 뜨거움이 신비주의적 기호이기 때문이다. 불 속에 있을 때 살피고 따져보고 유추하는 과정은 최소한으로 축소되거나 생략된다. 그러다보니 엉뚱한 뜨거움, 부적절한 불내기를 피할 수 없다. 그로 인한 피해가 생각밖으로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최근 한 과학자의 야욕으로 인해 야기된 일련의 파동에서 겪었다.
 
우리가 집단의 일부로 자기를 인식하는 훈련에 너무 익숙해 있다는 지적을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집단 속에 소속됨으로써 안정감을 얻는 이런 심리 상태는 이제 통념이 되었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자인 솔로몬 애쉬는, 두 개의 다른 선 가운데 다수의 집단이 실제로는 짧은 선을 더 길다고 주장하면, 피실험자가 처음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짧은 선을 더 길다고 대답한다는 실험 결과를 알려주었다. 개인은 집단의 의견에 순응하기 위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집단 압력이라는 것.

아름답지만 자칫하면 위험하다

뜨거움에 대한 열광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종의 신비주의적 현상으로 이해된다. 신비주의는 논리를 뛰어넘거나 논리를 무시한다. 황홀경을 통해 본질(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과 한 몸을 이루려는 것이 신비주의의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본질에 보다 빨리 닿으려는 욕구가 논리를 무시하거나 초월하게 하고 신비주의에 빠져들게 만든다. 일종의 조급증에의 유혹이라고 할까.
 
열정은 아름답지만 분별력이 없으면 위험하고, 공동체를 이루는 것 역시 아름답지만 논리를 결하면 위험하다. 우리는 조금 덜 뜨거워지는 대신 조금 더 합리적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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