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교육양극화 특별기획에 의하면 교육양극화란 잘 사는 20% 국민은 좋은 교육을 받아서 좋은 대학에 가고 잘못 사는 80%의 국민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해서 좋은 대학 못가는 두개의 극단적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말인 듯싶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이지만, 씹어 볼수록 바른 말(正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청와대는 강남과 강북지역 그리고 서울과 지방에 소재하는 고등학교들의 서울대학교 진학률 차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하여 “교육양극화” 현상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교육격차는 잘 사는 계층의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갈 확률을 높게 만든 불공정한 게임의 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누가 만들었는가. 저소득층 자녀들에게 학교선택권을 부여하지 않고 열악한 환경의 학교에 갈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교육평준화제도를 금과옥조처럼 지키려는 자들이 아닐까. 모든 학생들을 사교육과 조기유학으로 내 몰고 있는 공교육의 황폐화를 초래한 자들이 아닐까. 이러한 교육의 하향평준화 하에서 돈이 교육의 질을 좌우하도록 만든 자들이 아닐까. 즉, 돈 있는 집안의 자녀들은 사교육과 외국유학을 통해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돈의 많고 없음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는 두 가지 극단적 집단으로 양분케 하는 핵심적 변수라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의 삶의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이른 바 논리학의 “성급한 일반화”(Hasty Generalization)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홍길동과 김영식은 둘 다 부잣집 아들이지만, 홍길동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만 김영식은 좋은 대학에 못 들어가고, 이영자와 김명숙은 둘 다 가난한 집 딸이지만, 이영자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김명숙은 못 간다. 이런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경험은 부자 = 좋은 대학 입학, 가난한 사람 = 좋은 대학 불합격 이라는 “교육양극화”의 등식이 진리라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게 만든다. 세상 사람을 두 극단으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일견 “산뜻한 이론” 처럼 보여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일반사람들에게는 멋있는 진리의 말씀처럼 들린다. 그러면 이야기를 좀 좁혀서 지금 청와대에서 “교육양극화”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분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부자로서 좋은 대학을 나온 분들인가 아니면 가난한 사람으로 좋은 대학을 못나온 분인가? 그리고 지금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보좌하시는 지체 높으신 양반들의 자녀분들의 경우는 어느 극단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까? 모두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거나 졸업했다고 추정해야 교육 양극화의 이론에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 청와대에 계신 분들을 돈 없는 불쌍한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문제를 돈이 있고 없음에 기준하여 단순화 하는 것은 인간 자체만큼이나 복잡한 교육의 문제를 올바로 접근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화해와 통합보다는 갈등과 분열을 더욱 조장하고 심화시키는 매우 위험한 언어의 불장난이라 느껴진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꾀꼬리 소리같이 이쁜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처럼 잘 뛰고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 호랑이처럼 날쌔고 억센 사람, 토끼처럼 양순하고 부드러운 사람, 여우처럼 영리한 사람 등등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이 서로 다른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서 대학입학을 잘한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훌륭한 사람, 즉 모든 재주를 가진 사람은 아니다. 분명 어떤 면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대학에 들어가고 못 들어가고 하는 것은 이러한 개인이 지닌 인간의 잠재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잘 밝혀져 있다. 그런데 유독 인간을 부자와 가난한 자로 양분하여 교육의 문제를 단순하게 접근하게 만드는 “교육양극화”란 화두는 우리에게 삶을 고양시키며 우리의 통찰력을 높여 주기보다는, 우리의 삶을 갈등과 불만 그리고 분노로 몰아 갈 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언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청와대가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에 교육의 현격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강남지역의 학생들이 더 좋은 학교에 갈 확률이 높고 따라서 보다 나은 미래가 보장될 가능성이 높다. 교육은 사람의 경쟁력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고 이를 익히 아는 부모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심하기는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해 있어온 사실이고 이러한 교육열이 우리나라를 세계 11대 경제대국으로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당연한 부모들의 교육열을 탓할 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소외되는 계층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기회를 여하히 높여줄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육격차가 마치 잘 사는 사람들 때문에 생긴 것처럼 계층 간 갈등을 조장하지 말고 그러한 교육격차는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고, 특히 우리처럼 사람 이외에 다른 자원이 없는 나라에선 그러한 경쟁이 더 치열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관건은 여하히 빈곤자녀들에게 좋은 교육기회를 제공하여 빈곤의 대물림을 끊을 것인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모든 재산을 투입하고 기러기아빠도 마다 않는 우리 한국 부모의 유별난 교육열을 교육경쟁력으로 승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우리 교육의 경쟁력과 공평성이 동시에 해결될 것이다. 청와대 기획시리즈는 소외계층의 교육복지 향상을 위한 다양한 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수단은 적극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만으로 교육격차 문제와 빈곤의 대물림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국가 재정능력의 한계로 인해 충분한 재원이 조달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도움이 현재와 같이 저소득층 학생들을 열악한 환경의 학교에 묶어두는 교육평준화제도 하에선 능력 있는 저소득층 학생들의 빈곤탈출 기회를 봉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해결책은 현재의 평준화제도의 근간을 너무 흔들지 않으면서 제한적 경쟁을 도입하는 것이다. 즉 현재의 교육구를 좀더 크게 나누어 광역별로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를 허용하여 그 지역의 능력이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토록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지금처럼 추첨을 통해 진학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장학금제도와 학비융자를 대폭 확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한적 경쟁의 도입은 현재와 같은 강남지역에로의 쏠림 현상을 완화하여 부동산투기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소득층과 지방의 유능한 학생들에게도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육제도의 개선과 더불어 방과 후 학교를 통한 사교육의 교내화, 소외지역의 교육여건 개선 지원, 등을 통한 공교육의 활성화와 대학입시에서 지역균형선발, 실업계 특별전형의 확대 등이 이루어지면 교육의 경쟁력 증대와 더불어 교육격차가 실질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육의 선진화는 “대한민국의 선진화”라는 역사적 대장정의 첫 행보이다. 우리는 지금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서 있다. 우리가 앞으로 새 문명의 중심권에 서 있는 선진국을 창조하느냐 역사의 변방에서 헤매는 가엾은 국민이 되느냐는 우리가 교육선진화를 성취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새 문명은 지식과 정보를 핵심 추동력으로 삼는 시대이기에 새 문명의 결정권은 교육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원이라곤 오로지 사람 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나라가 지난 40여년 사이에 선진국의 문턱까지라도 올라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 소 팔고 논 팔아 자식의 교육을 위해 혼신의 열정을 바친 한국의 맹모, 맹부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오늘 한국의 가능성은 바로 한국인의 뜨거운 교육열에 있다. 문제는 이 뜨거운 교육열을 어떻게 교육선진화로 승화시키느냐가 앞으로의 큰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