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일=편집인 김원섭]요즘 30도를 넘나드는 무더위속에 몸에 걸친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 누구나 벌거 벗은채 태어나고 죽어 염할 때 벗겨진다. 가리면서 삶이 시작되고 벗으면서 삶이 끝난다.
지난 2009년 6월24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방식의 존엄사가 시행된 세브란스 병원의 병실에는 가족들의 흐느낌만이 가득했다. 병원 측은 대법원에서 존엄사 인정 판결을 받은 77세 김모 할머니를 오전 9시께 9층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떼어낼 15층 1인실로 옮겼다.
김씨는 유동식 공급 호스와 기계와 연결된 호흡기를 각각 코와 입에 끼고 얇은 이불을 목까지 덮은 상태로 병실 침대에 누운 상태였다.
오전 9시50께 가족과 의료진, 변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임종 예배가 시작되자 가족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끊임없이 닦아냈고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김씨 옆에 서서 `어머님의 은혜'를 울면서 불렀다.
예배가 끝나고 “호흡기를 떼어내겠습니다”고 말한 주치의는 오전 10시24분께 김씨의 입과 코에 연결된 호흡기ㆍ호스를 떼어낸 뒤 호흡기 등에 연결된 기계의 전원을 껐다.
김씨는 2008년 그해 2월 폐암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조직검사를 받다 과다 출혈에 따른 뇌손상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으며, 자녀들은 기계장치로 수명을 연장하지 않는 것이 평소 어머니의 뜻이라며 소송을 제기,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대법 판결은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원치 않는 환자의 의견을 존중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미국의사협회(AMA)과 독일의사협회가 정한 지침을 따르고 있다.
인간은 능동적인 존재로, 삶을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능동적으로 의미를 생산해낸다. 따라서 죽음이란 내가 만들어온, 그리고 앞으로 만들 수 있는 의미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노인의 죽음보다 어린아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도 노인은 어느 정도 삶에서 자신의 의미를 실현한 반면, 어린 아이는 무궁무진하게 펼쳐질 삶의 의미를 꽃피지도 못한 채 져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저서에서 인생의 유일한 최대 관심사는, 그 자신이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물론,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진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신조로 삼아 생활하는 것이었다. 그 길에 자신의 몸을 바치는 모습은 그가 말하는 ‘실존’이었으며, 이런 관심에 대해 타성적인 자신의 생을 새삼 스스로 대처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주체적 자신의 인간다운 점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에게는 육신이 살고 죽는 일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을 초월해 가치 있는 것의 존재를 믿으면서 그 희망에 목숨을 걸고 육체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을 의미했다
아무런 희망 없이 영원한 생명에 의탁해 살아가지 않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생명을 살아가는 생은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살아 있는 시체로서의 생이다. 설령 그러한 생이 일반적 의미에서 희망에 가득 차 있고 영광으로 빛나는 것일지라도 실은 인간적으로 절망이며 비참한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인간이 병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절망이란 최대의 불행이자 비참함일 뿐 아니라 타락인 것이다
붓다는 ‘나’라는 자아관념을 벗어나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무아설’이다. 나라는 것은 없고, 따라서 나라는 관념이 가진 욕심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
‘윤회’의 관점에서 바라본 죽음은 삶과 구별되지 않는다. 죽음이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교는 허무주의를 지향하지 않는다. 불교는 지향해야 할 목표를 명확히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열반’으로 일체의 자아관념을 다 버리고 그 무엇보다 자유로워진 궁극의 상태이다. 붓다가 다다른 단계이자, 스님들이 끊임없이 이루려고 노력하는 상태가 열반이다. 열반은 윤회조차 끊긴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따라서 열반의 경지에 이르면 죽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 그래도 ‘아무것도 아닌’ 현상이다.
불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나온 주장이다. 또한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현실계보다 높은 경지를 추구하기 때문에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존엄사가 ‘현대판 고려장’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국 역시 지난 2018년 2월 4일 부터 연명의료이 시행되었지만 아직 안락사와 존엄사를 혼동하거나 사회적 인식이 준비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불교경전에 나오는 이 ‘흰 쥐와 검은 쥐의 비유’를 들어서 인생의 무상과 깨우침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톨스토이는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허망하게 낭비할 수는 없음을 투철하게 반성하고, 어제의 그릇된 삶에서 전미개오(轉迷開悟)한 참회와 성장의 새로운 삶을 그의 소설 속에서 제시하였다.
그러나 존엄사에 대해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학습효과가 되지 않길 오늘도 걷는다.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 여는 세상-“백범 암살되지 않았다면 동족悲劇‘6.25동란’ 없었다” (0) | 2023.06.26 |
---|---|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칩 여는 세상-6.25동란 73년➫“단장의 미아리고개” (0) | 2023.06.25 |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여는 세상-대한민국 ‘캐스퍼 아동공화국’➷8년간 기록조차 없이 아동 2236명 사라져 (0) | 2023.06.23 |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 여는 세상-가뭄이 심하면 신을 화나게 하라‘夏至’➘“아버지의 날, 우리나라는 없다” (0) | 2023.06.21 |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여는 세상-윤석열發‘난민 포비아’➽“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0) | 2023.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