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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만든‘간첩 황태성’재판기록 없다”

능산선생 2009. 11. 27.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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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만든‘간첩 황태성’재판기록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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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만든‘간첩 황태성’재판기록 없다”
[CNBNEWS] 2007년 03월 03일(토) 오전 07:15 가 가| 이메일| 프린트

지난 63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15만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간첩 황태성 사건’ 재판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일부 언론이 ‘간첩 황태성사건’의 조작여부를 보도하려고 하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으로 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는 조건으로 기사를 싣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언론사는 이를 바탕으로 지금 거대 언론재벌로 군림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최근 민원이 접수된 ‘간첩 황태성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의 재판기록이 소멸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후 그당시 중앙정보부에서 ‘간첩 황태성사건’을 소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간첩 황태성 사건’을 재조사할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지만 재판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그동안 언론과 증인 등을 통해서 이를 재조명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당시 중앙정보부 관련자들이 이에 대한 진술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그당시 ‘간첩 황태성사건’을 주도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기 전인 1979년 10월1일 독일에서 실종돼 변사체로 발견됐다.

■모 언론, 보도 않는 조건 거액융자 언론재벌 성장
이에 따라 그 당시 사건을 맡았던 검찰 및 중정요원들을 토대로 사건을 재조사해야 하지만 마치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중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 간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간첩 황태성사건’의 조사에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다.

5·16 이후 황태성이 박정희와 접촉하기 위해 내려왔을 때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그를 만나보도록 했다고 언론기록에 남아있다.

그때 김종필씨는 중앙정보부를 조직하느라 반도호텔 한 층을 온통 차지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황태성 사건’이란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이자 일제시대부터 공산주의 이론가로서 대구 10·1사건 당시 경상북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지낸 황태성이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차관)이라는 고위직에 있다가 5·16 직후인 1961년 9월 박정희와의 비밀회담을 위해 밀사로 내려온 것을 말한다.

그 당시 박정희는 황태성을 체포해 간첩죄로 재판을 진행하면서도 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황태성의 인도를 요구하는 미군측의 강력한 요청을 계속 거부해 그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투표일이 가까워오자 "이북에는 김일성이 있고 남한에는 박정희가 있다. 이북에는 공산당이 있고 남한에는 공화당이 있다. 공화당 창당 자금은 황태성이 댔고 그로부터 공화당 창당에 대한 밀봉교육을 받았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은 삐라가 시내에 뿌려지기도 했다.

야당의 색깔론 공세로 코너에 몰린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정희는 "나를 매카시즘이란 후라이팬에 달달 볶아 새빨간 빨갱이를 만들려는 수법이다"라며 반박했지만, 목소리에는 그리 힘이 없었다.

■박정희후보, 윤보선후보 50만표차 낙승”
이와 관련, 1963년 5대 선거 당시 <조선일보> 미국특파원이었던 문명자씨가 월간 <말> 1997년 10월호에 발표한 '박정희·김종필의 좌익전력'이란 글에 의하면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황태성 사건' 등 박정희 사상논쟁이 벌어졌을 때 문명자씨는 미국 국회도서관에 있던 박정희 관련 자료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5·16에 반대했다가 미 국방성의 배려로 국방성 장학생으로 워싱턴에 와 있던 강문봉 장군(자유당 시절 육군 정보국장·작전국장 역임, 중장으로 예편)이 그녀에게 귀가 번쩍 뜨일 얘기를 해주었다.

"미군 정보기관인 G2의 비밀정보원 출신으로 한국에 주재하면서 '황태성 사건'을 제일 먼저 알아챘던 래리 베이커라는 사람이 박정희에 의해 추방돼 자기 고향인 네브라스카에 돌아와 있다고 합니다."
강문봉 장군은 과거 자기 군 동료들을 통해 그 같은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래리는 한국군 창설 이후 육군참모총장의 군사고문을 역임하는 등 가장 오래 한국을 담당한 하우스맨 밑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한국에서는 한 보험회사의 세일즈맨으로 가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5·16 후 외교관 추방 1호가 그레고리 핸더슨 문정관이고 민간인으로서는 래리가 추방 1호인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황태성 사건에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문명자씨는 강문봉 장군에게 부탁해 래리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곧 그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래리 베이커는 문 씨의 취재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그래서 문 씨는 그에게 황태성 사건에 대한 질문서를 보냈는데, 곧 다음과 같은 요지의 회답이 왔다.

"황태성과 박상희는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할 때의 신원보증인이다. 5·16 이후 황태성이 박정희와 접촉하기 위해 내려왔을 때 박정희는 김종필에게 그를 만나보도록 했다. 나는 이 정보를 입수해서 상부에 보고했는데 상부에서는 황태성·김종필이 회동하는 반도호텔을 감시하라고 했다.

그때 김종필은 중앙정보부를 조직하느라 반도호텔 한 층을 온통 차지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반도호텔 8층 몇 호실에서 몇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를 모두 조사해 상부에 보고했다. 황태성이 내려온 목적은 박정희와의 연대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한 미국측은 황태성을 미 정보기관에 인도하라고 박정희에게 계속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황을 인도하지 않고 계속 시간을 끌었고, 오히려 그 사건을 추적하는 나를 한국에서 추방했다."
문명자씨는 래리 베이커의 증언을 즉시 기사화해서 <조선일보> 본사로 타전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기사는 보도되지 않았다고 했다.

1917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한 박정희는 일제시대에 문경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保國 滅私奉公)'이라는 혈서(血書)를 쓴 덕분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일본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관동군 장교로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박정희씨는 불행하게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지만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변신의 변신을 거듭했다.

1947년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했지만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14연대에서 지창수 상사 등 남로당 하부 세포가 주도한 여순반란이 일어났으며 이승만 정부는 반란이 진압된 후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전개해 육군본부 정보장교로 근무하던 '고정간첩' 박정희도 검거했다.

공개된 재판기록과 미군정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의 당시 남로당 직위는 '군사 총책'이었다. 그는 남로당 고위 간부인 이재복·최남근 등과 함께 군대 조직 특히 그가 중대장으로 있던 육사 내부에 남로당 세포를 침투시키고 무력혁명을 획책하는 활동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불명예 파면되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5일만에 군으로 복귀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정확히 11년 후에는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 18년간 권좌에 머물렀다.

- CNBNEWS 김원섭 기자 www.cn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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