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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의 날’,문제는 金縢之詞야, 이 밥통(언론)아!”

능산선생 2011. 4. 8.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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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7일, ‘제 55회 신문의 날’,
문제는 金縢之詞야, 이 밥통(언론)아!”
“달면삼키고 쓰면뱉는 언론,국론분열 주범‥‘재스민 바람’냉정하게”
일부 인터넷매체 및 언론,방사능 오염 괴담분장 국민 분열
2011년 04월 07일 (목) 05:47:24 편집인 편집국장 김원섭 infinew1@newsplus.kr
   

신문의 날(7일)을 하루앞둔 6일 청와대는 이명박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신문 보는 모습을 공개했다.<연합뉴스>

4월 7일은 55돌을 맞는 ‘신문의 날’이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결성되면서 <독립신문〉창간 61주년 기념일인 1957년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하고 그 주를 '신문주간'으로 정하면서 ‘신문의 날’이 탄생됐다.

55돌의 신문의 날을 맞아 미국의 사상가이며 「영웅숭배론」의 저자인 칼라일을 되새겨 본다. 그는 『어느 정도의 반대는 인간에게 큰 도움을 준다』고 역설하였다. 공산주의의 전제사회에서는 「반대」를 전연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상, 하나의 주의, 하나의 체제, 하나의 구호,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을 획일화하려는 전체주의의 세계관과 조직, 이것이 공산주의다.

공산주의는 언론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산치하의 국민들은 숨 막히는 질식 상태에서 권력자에 끌려 다니는 고단한 생활을 한다. 흘러가지 않는 물은 썩게 마련이다.

우리는 자유사회의 자유체제를 기본 목표로 삼고 있다.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의 생각과 견해를 자유로이 발표할 때 좋은 기획이 나오고 훌륭한 아이디어가 창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어느 정도의 반대를 받아들여 그것을 소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어느 정도의 반대는 인간사회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나와 반대되는 의견이 나올 때 인간은 처음에는 다소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반대는 우리에게 반성의 기회를 준다. 나의 생각이 저 사람의 의견대로 혹시 잘못되지 않았는가 하고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자기를 냉정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하게 된다. 그럴 때에 이상적인 묘안이 창출되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일화를 전하고 싶다.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일념으로 나르는 새를 모방하기 위해 새 깃털을 모아 밀랍으로 어깨에 부친 이키루스는 비상을 시작한다.

영원히 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태양을 향해 힘차게 날아 올라간다. 태양이 가까워지면서 그는 밀랍으로 부친 날개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위 온도가 높아지면서 밀랍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추락한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한 일화로 세상이 주는 날개는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위에서 전개한 글에서 '동전의 양면성'을 봤듯이 신문의 날을 맞아 언론에게 좋은 충고를 줄수 있다고 본다.

정부와 언론이 민주주의·공개성·국가이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이용하는 사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언론사들이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고, 정부의 정책 궤도 수정에 필요한 여론 환경을 형성해야한다 볼수 있다.

국민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언로의 길보다는 자기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이런 언론사는 한국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전반에 걸쳐 毒이 되지 得이 되지 않는다. 특히 외눈박이식 보도는 여론을 분열시키고 일반의 역사인식마저 왜곡시킬 수 있다. 표현의 자유로 넘겨 버리기엔 그 해악이 너무 크다.

그예가 지난 번 광우병사태에서 여실히 보여줬다. 지금 일본의 대지진에서 발생한 원자력발전소의 붕괴에서 파생된 방사능 오염이 인터넷이나 트위터등을 통해 부정확하고 근거 없는 정보들이 떠돌면서 방사능 오염에 대한 불안감을 과도하게 증폭시키고 있다. 또 한번의 괴담이 '제2의 광우병 사태'를 유발할수도 있다. 일부 인터넷 매체와 일부 언론은 이런 과정을 여과없이 받아 국민들을 혼돈의 세계로 몰아넣어 가고 있다. 이들 언론들은 무엇이 국익이고 공익인지 알고 행동하기 바란다.

민주국가에서 언론은 정부정책에 대한 감시기능과 보도의 자유를 보장 받아야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주장을 과도하게 펴기 위해 사실과 다른 과정과 허위를 뒤섞을 때 언론은 사회로부터 외면과 불신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제 언론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정보의 쓰레기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야 하고 사실을 들춰내는 것 못지않게 사실을 가려내는 것도 중요한 임무다.

지금 언론은 종종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싸잡아 비난하고 나선다. 아무리 기사 타이틀이 선정적이고 충격적이어야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고 하나 언론은 지극히 사실에 입각한 보도를 해야 한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도리다.

늑대가 이리의 탈을 쓰고 행동하는 전두환 정권때의 언론의 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특히 이런 언론사는 피를 흘려가면서 독재정권으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챙취한 국민을 우롱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피를 흘려가면서 국민이 얻어놨더니 이런 언론사들이 누리고 있다. 무임승차도 이런 법이 없다. 언론의 자유는 공공재이다. 그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이나 우리를 억압했던 언론이나 누구나 평등하게 누리는 재원인 것이다. 언론은 이런 재원을 잘 활용, 국격을 높여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론을 조성하는 매체들이 온.오프 라인상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다. 온라인 매체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온라인 매체들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사회의 여론을 올바르게 수용하고 전달해야 하는 언론의 의미를 저버리고 이키루스의 날개처럼 행사하는 일부 극소수의 언론이 있다. 자기 입맛에 맡지 않으면 뱉고 언로의 창달은 뒷전에 두고 이익만 쫓아다니는 하이에나의 근성을 가진 언론도 있다.

소위 보수라고 자청하는 언론사들은 철학적 원칙도 없고 사회통합을 달성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없다. 보수(保守)는 보전하여 지킨다는 뜻도 맡지만 21세기의 보수는 보수(保修: 건물 따위를 보충하여 고침)로 변해야 한다. 지금 국민의 의식수준은 21세기에 있는데 언론 정당은 19세기에서 있으면서 대문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앉아 있는 것 자체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라 표현해야 맞다.

세상이 주는 날개는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언론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너무 낮게 날면 바다로 추락하고 교만하고 흥분하여 너무 높게 날면 햇빛에 날개가 녹고 만다. 오히려 이것으로 실패, 죽음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키누스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날개 때문에 실패했다.

세상이 주는 날개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언론사는 날개를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바란다. 언론은 국익을 위해서는 때로는 金縢之詞도 필요할때다.

이제 선진국인 미국의 언론에서 볼수 있듯이 보수언론들은 공공재의 제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지금 주장이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 권위있는 정론에 독자들은 목말라 하고 있다. 그래서 언론은 무엇보다 우리사회가 처한 위기가 무엇인지 우리사회가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규정하여 우리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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