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 여는 세상-태영호曰“‘4·3항쟁’,김일성 폭동”➙박근혜, 반동분자 조카?!

능산선생 2023. 4. 3.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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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메일=편집인 김원섭]“‘상상도 할 수 없는 것 이상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던 제주4.3의 절대 비극적 유산을 극적으로 극복해 온 제주민들의 역사적 궤적의 귀결은 혁명적 자기 변혁을 통한 평화, 인권, 화해, 상생의 모습 자체였다.”

지난 2018222일 김대중도서관장 박명림 교수(연세대)는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열린 학술 심포지엄 제주 4.3의 역사적 진실과 한국 현대사에서의 의미에서는 제주 4.3 이후, 제주도민의 진실과 화해, 포용, 상생을 위한 노력은 세계보편적 치유 모델이라며, “4.3 , 모든 생명이 죽고 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 제주민들은 절대 폐허를 넘어 진실, 화해, 상생을 향한 상상할 수 없는 고결성을 보여 줬다고 했다.

그는 킬링필드, 아우슈비츠와 같은 대학살에 비춰, 제주 4.3 극복과정과 그 형태는 제주 모델’, ‘제주 4.3 치유모델’, ‘제주 정신으로 이름 짓고, “모든 국민, 지도자와 공유하는 한편, 남남갈등과 남북분단의 극복 모델, 과거사 극복의 모범적 세계 보편 모델로 나눌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이른바 제주 모델의 핵심은 민관 협력과 협치 정신, 화해협력과 평화공존의 정신, 도민들 사이의 단합과 연대, 결속의 정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지속성이라고 꼽았다.

“19473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4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9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올해는 4·3 항쟁 발발 74주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갓난아기가 어느덧 일흔 살이 되었고, 열 살 난 어린이들이 여든 살 노인이 되었다. 아버지와 형을 잃은 열 살 안팎의 어린 소년·소녀들은 군인과 경찰에 의해 깡그리 불타 폐허로 변해 버린 마을을 고사리같이 여린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고, 이토록 아름답게 제주도를 복원시켰다. 이는 기적적인 일이며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다.

현대사의 비극으로 불려온 제주 4·3사건(1948)이 발생 66년 만인 지난 2014년에 ‘4·3 희생자 추념일로 명명되고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됐다.

, 바람, 여자라는 삼다 제주도가 4.3삼풍으로 인한 시체, , 눈물의 삼다로 변했다.

4.3은 세계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라지는 세계분단의 과정에서 발생한 경계국가 한국의 대비극이다. 특히 세계분단과 한국 분단과정에서 제주는 중앙에서 가정 먼 이중경계지역이었다.

민주화 이후 19981123일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이 있었고, 19991226일 국회에서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112일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착수되었다. 2003329일 조사위원회에서 보고서를 확정하였고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1031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이어 2006년 민간 주도 위령제에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 참석했다. 보수 성향의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중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고 큰 아버지 박상희가 제주항쟁에 참여한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하지 않았다.

지난해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4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 4.3의 아픈 역사와 무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아픔을 치유하며, 화해와 상생,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의무”, “붉은 동백꽃 만개”, “비극에서 평화로 나아간 4.3 역사의 힘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윤당선자는 제주 4,3 . 74주기 추념식에 최초로 참석하는 데 방점을 두는데 그쳤다 외세와 이승만 독재정권이 빚은 원인에대해서는 침묵하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전에 돌입할 양상이 전개되고있다. 나라의 지도자는 함부로 안보를 거론하면서 선제타격론을 주장하는것은 지도자로서 자격을 상실하는것이나 다름없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다면 평화의 소중함부터 깨우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면교사로 삼기바란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추념일로 지정된 제주4.3사건에 대해 국민의힘 태영호(서울 강남 갑) 국회의원이 북한 김일성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주장, 파문이 일고 있다.

태영호 의원은 북한 출신으로, 주 영국 북한 공사로 근무하다가 탈북해 20168월에 한국에 입국했다. 그해 12월 주민등록을 해 대한민국 국민임을 공식으로 인정받았고, 지난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북한 김일성 지시에 의해 제주4.3 촉발됐다는 태 의원의 주장은 오랜 세월 제주도민사회를 괴롭힌 색깔론 중 하나다. ‘제주4.3은 공산폭동이라는 기존 주장의 탈북자 태영호버전인 셈이다.

그럼 태영호 말마따나 박근혜도 반동분자의 조카란 말인가?

일부 극우단체들은 아직도 4·3항쟁을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이 주도하여 인민군이 주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명박근혜정권에서는 4·3특별법과 4·3위원회를 폐지하려고 몇 차례나 시도했고, 이미 희생자로 결정된 분들 중 일부에 대해 그 결정을 취소시키려 했다. 극우세력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2009년부터 진상조사보고서를 파기하고 희생자 결정을 취소하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심판, 행정소송, 국가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보수가 아닌 수구꼴통들의 주장은 위치에 맞지 않는다. 그들의 추종하는 박정희, 그는 누구인가? 박정희는 여순반란 사건의 주동자였으며 그 형 박상희는 대구 폭동사건의 주동자였으며 또 다른 형인 박한생은 월북의 의혹을 받고 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2년 전인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경상북도 선산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06일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박상희는 이미 경북지역의 명망 있는 좌파 지도자였는데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박정희가 군대 내에서 대위의 계급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박정희는 투철한 이념에 따라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이 아니라 박상희의 권고로 당시 대세였던 좌익에 줄을 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형이 사망하고 대구 항쟁이 진압되자 자발적으로 좌익의 정보를 빼내 '세작' 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을까? 4.3 사건이 발생했고 진압과정에서 정부군의 기세가 등등하자 그는 조금씩 전향의 기회를 엿보았던 것 같다.

제주사람들에게 4.3 항쟁은 되살리고 싶지 않은 처절한 비극적 역사다. 역사적으로 제주사람들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착취·수탈구조와 불의에 맞서는 저항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한 역사를 통해 자존심을 지켜왔지만 4.3으로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4.3 이후 6·25를 거치면서 권위주의적 반공체제가 강화되면서 제주사람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해왔다.

4.3희생자 위령비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절대 용서의 비문앞에선 세계 종교와 사상의 근본 가르침인 사랑과 관용, 치유와 회복을 현실에서체험하며 무릎을 꿇는다.

그래서 4·3 기념일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로, 반드시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아픔을 해소하고 국민 통합으로 나가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4.3기념일의 역사관을 바로 세워야 일본의 역사왜곡에도 대처할 수 있다.

백비(白碑).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일컫는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새기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4.3 평화기념관에 있는 '백비'의 설명판에 적힌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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