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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든다는 것

능산선생 2006. 4. 11.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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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된다’는 말이 있다. 얼마 전까지 막강한 권한을 누리던 전직 대통령들이 지금은 대부분 칩거 중이다. 그리고 그분들이 통치하던 시절 쫓겨 다니거나 감방에 웅크리고 있던 이들이 지금 국정을 쥐고 있다. 그런데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활개 치던 이들 가운데 또 몇 사람이 똑같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추운 겨울도, 서슬 퍼런 권세도 다 지나간다. 어김없이 바뀌는 계절과 마찬가지로 얼마 전까지의 권력도, 현재의 기준과 대단한 사람들도 또한 그러하다. 모든 시작은 끝이 있게 마련이고 생명은 다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렇게 세상이 무상하고 덧없기만 한 것일까. 이 정반합(正反合)의 쳇바퀴는 그냥 돌기만 하는 것인가. 오히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역지사지하는 겸양이 필요하고 계속 모자라기만 한 우리의 미완을 계속 채워가는 노력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건 우리에게 원로가 없다는 점이다. 아니 원로를 원로로 대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회가 생겼다 싶으면 저마다 자기중심으로 새롭게 판을 짜고 역사마저 다시 재해석하겠다니 세상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기가 아는 것이 다인 것처럼 자만하는 사람은 철부지다.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은 어느 분야에서든 항상 원로들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그에 비해 국가경영에 중장기 시나리오가 통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경우, 나이든 사람들이 설 자리조차 없다. 그분들의 가치가 제대로 쓰임 받지 못하니 곧 국력의 낭비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모른다. 잡초는 한 여름 무성하게 자라다가 겨울이 시작되면 자취를 감춘다. 나무는 자라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으나 사시사철을 묵묵히 겪어가며 믿음직하게 자란다. 자리를 탓하지도, 탐하지도 않는다. 봄날의 환희를 함께 즐기고 한 여름의 땡볕도 끌어안는다. 한가을 적막도 혼자 지키고 이윽고 겨울에 맞닿으면 잎을 다 지운 채 인내한다. 때를 기다리며 새들의 쉼터를 제공하다가 마침내 재목으로 쓰이거나 땔감으로 버려져도 투정하지 않는다. 스스로(自) 그러려니(然) 할 뿐이다.

모두 나무를 닮았으면 좋겠다. 제발 모두 철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때그때 지나가는 철(季節)을 제대로 겪은 사람들이 앞으로 선생이 되고 경영자가 되고 목사가 되었으면 한다. 특히 국가의 백년대계를 논하는 정치인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그럴 수 있다면 시행착오가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홍위병이 뭔지 모르면서 홍위병을 자처하는 이들의 분별없는 열정과 ‘혁명’의 도움 없이도 성숙사회로의 진입이 예측 가능하리라.

그래서 말을 아껴야 한다. 지도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또한 남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틈틈이 남의 경험과 역사의 경험까지 구해야 하고 관련 책이라도 조용히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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