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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 여는 세상-박정희“한일수교위해 독도 폭파시켜 없애겠다”➷아사달 지하에서 분노!

능산선생 2022. 10. 25.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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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메일=편집인 김원섭]옛날에는 동해에 여러 섬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러 섬 가운데서도 가장, 큰 섬에 살 던 큰 용이 꼬리로 섬들을 모두 때려부수었다. 그래서 울릉도와 독도만 남게되었다는 것이다.

그 용이 울릉도는 복섬이라고 하면서 성인봉 꼭대기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또는 그 섬들은 모두 일곱 섬이었는데 해적들이 많아서 용이 모두 꼬리를 쳐서 없애 버리고 말았는데 이 섬 이름을 가산도라고 불렀다.

514(지증왕 13)에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킨 이사부(異斯夫)는 내물왕의 4대 손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거친 반역의 섬 우산국(于山國.울릉도)을 간단한 계략으로 정복했다. 514년 그는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섬에 도착했다. 사자 조각을 해안쪽으로 세운 뒤 유황불을 피워 마치 사자의 입에서 화염이 내뿜어지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북과 나각으로 굉음을 쏟아냈다.

이어 항복하지 않으면 사자를 섬에 풀어 모두 밟히고 물려죽게 하겠다고 협박, 진짜로 항 복을 받아냈다. 울릉도 남양포구에 서 있는 사자바위가 그 물증이란 전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킨 이사부야말로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에 복속된 근원을 제시한 최초의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우산국은 신라를 거쳐 고려와 조선의 땅으로 자동 상속됐다.

독도 최초의 국기게양대는 지난 19716월 해병대가 설치했다. 포항 해양경찰의 요청으로 해병대 1사단 장병 3명이 통통배를 타고 독도에 상륙, 한 달간의 작업 끝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했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은 독도의 명칭이 '돌섬(石島)-독섬(石島/獨島)-독도(獨島)'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일본인의 구술록을 시마네현 총무부 소장 자료에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제2조의 내용은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할 사()"인데, 일본 정부는 석도가 독도라는 주장을 증명할 문헌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구한말 울릉도로 이주한 많은 전라도 사람들이 돌로 된 섬을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불렀고, 이를 한자로 적은 것이 '석도'(石島)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소장이 찾은 구술록은 1953711일 어부였던 오쿠무라 아키라(奧村亮, 당시 43)의 발언을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2과가 기록한 문헌인 '죽도어업의 변천'이다.

울릉도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는 오쿠무라는 "당시 조선인은 '랑코섬'을 독도라고 했다.(當時, 朝鮮人, ランコ(竹島)獨島(トクソン)) 일본인과 대화할 때는 '랑코섬'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오쿠무라의 구술록에서 독도 옆에 기재된 '도쿠손'(トクソン)이라는 글자에 주목했다. 도쿠손은 '독섬'의 일본식 발음을 표기한 것이다.

김 소장은 "일본인의 구술에 따르면 일본인은 독도를 죽도(竹島)보다는 '랑코섬'이라고 했다""일본인도 독도(獨島)와 독섬을 동일하게 파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돌섬-독섬-독도 음운변화설이 힘을 얻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시마네현 도쿄사무소 직원이 현지로 가거나 관계자의 의견을 묻는 등 고심 끝에 정리했다'는 구술록의 해제를 소개하면서 "일본 정부가 생산한 문서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해방 직후 국내에서 창간된 일간지 '한성일보'1948613일자에도 '독도(獨島)는 우리의 섬, 원명(原名)은 돌섬(石島)'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독도에 대해 "원래 이름은 '돌섬'(石島)인데 이후 와전돼 '송도'(松島) 또는 독섬(獨島)으로 개칭됐던 것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1025일은 독도의 날이다.

독도의 날은 19001025. 고종 황제가 반포한 대한제국 칙령 제41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본의 불법 채벌에 맞서 반포된 칙령에는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후에도 독도가 우리 영토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6.25 전쟁 당시 주민들의 목숨을 건 전투 덕분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던 1953, 일본은 우리나라의 행정력이 약해진 틈을 타 독도에서 빈번히 우리 어민들을 쫓아내고 급기야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말뚝까지 설치했다.

이에 분노한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해 독도를 지키기 시작했다. 섬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했던 의용대는 갈매기똥이 섞인 빗물을 마셔가며 일본의 접근을 감시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무기는 몇 정의 소총과 기관총 그리고 조준대 없는 박격포가 전부였지만 나무로 만든 가짜 대포로 일본의 눈을 속이는 등 탁월한 기지와 위장전술로 순시선과 함정을 여섯 차례나 격퇴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정부의 지원 아래 섬 암벽에 한국령이라는 글자를 새겨 독도가 대한민국의 땅임을 분명히 알렸고 독도에서 미역이나 전복을 채취해 오던 제주 해녀들까지 합세해 해산물을 판 자금으로 의용대를 지원했다.

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1956년 독도의용수비대는 모든 업무를 경찰에 넘기며 활동을 마무리 했다.

그러나 1965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일 수교협상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섬(독도)을 폭파시켜서 없애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명박근혜정권때 독도에 대한 독도에 대한 지배권은 거의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상당한 보고서에 2013년 상반기까지 표기되던 독도와 동해 명칭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난 2014년부터는 '돌섬·일본해'로 표기 변경됐다.

독도(Dokdo)의 경우 2014년 이후부터 돌섬(Liancourt Rock)이란 명칭이 우선적으로 표기된 사실이 드러났다.

미 의회 조사국은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 의회의 공식적인 연구기관이다. 여기서 발표되는 보고서는 전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상당하다.

그러나 일본은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 때부터 13년째 방위백서에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끄는 자민·공명 연립여당이 중의원 조기 총선에서 압승을 거둠에 따라 아베의 정국 장악력이 공고히 돼 전쟁 가능한 국가로의 개헌 작업에도 한층 힘이 실릴 것으로 보여 독도문제, 위안부, 역사왜곡등의 난제는 순탄치 않을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치는가?

힘이 없는 민족은 망국민으로 전락하고, 힘이 있는 국민은 독립국의 영광을 누린다. 이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냉엄한 진리다. ‘어느 역사나 해양을 지향할 때는 번성하고 대륙을 지향할 때는 쇠퇴했다는 것을 해상왕 장보고의 어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세기 동북아의 새로운 분쟁은 섬에서 분출되고 있다. 독도를 놓고 한일관계의 정쟁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와는 쿠릴열도 4개 섬, 중국과는 센카쿠의 소유권을 두고 벌이는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신생국으로서 안보, 경제, 민주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를 바로 세워 내부 분열을 끝내고 통일된 비전을 갖는 사회를 만들어 선진국 진입의 길을 닦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도 자력(自力)의 힘을 길러나가야 한다. 지금 일본의 독도 강탈행위에 대해 대안 없는 흥분은 또 다른 화를 불러 올수 있다. 일본은 지금 독도를 국제 분쟁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각종 전략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남남갈등을 부추키고 있는 사드를 독도에 설치하는 것은 어떤지 제안 해 볼만 하다. 그럼 일본이 독도 강탈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10월의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나? 망국의 설움과 뼈저리는 분단과 아픔을 다시 반추하며 힘을 길러 제2의 도약을 시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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