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여는 세상-尹아,‘박종철&이태석忌日’ 짓밟지마라➫한남산성 나와 오라 받으라!!

능산선생 2025. 1. 1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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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메일=편집인 김원섭】‘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1987년 1월 14일 밤 12시, 경찰 조사를 받던 1964년 4월 1일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에서 박정기와 장차순의 아들로 태어난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사망한다.

“예수님께선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굳이 신부가 됐느냐고, 의사로서도 소외된 이웃을 도울 수 있다고, 왜 굳이 아프리카까지 갔느냐고,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다고. 그 모든 물음에 고 이태석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

이 신부는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자청해서 아프리카 수단으로 갔다. 내전 중인 남수단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곳을 자원하는 성직자는 거의 없었다. 거기서 이 신부는 헐벗고, 굶주리고, 다치고, 병에 걸리고, 희망을 상실한 주민들에게 의술과 예술, 따뜻한 가슴을 베풀었다. 그리고 올해 1월 14일 대장암으로 선종했다. 48세의 젊은 나이였다.

‘1월14일’은 ‘박종철 열사’ ‘이태석 신부’의 忌日이다.

박종철 열사는 한국의 민주주의 뿌리의 결정체다. 반면 이태석 신부는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운다.

1987년 6월 10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리며 6월 민주 항쟁이 시작됐다.

일명 유월항쟁은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점증된 민주화 열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 종말을 가져왔다. 전두환 대통령의 護憲 조치와 경찰에 의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直選制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6월 항쟁은 군사적 독재 정치가 종식을 告하고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각계각층의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항쟁은 노동자, 학생, 시민, 빈민, 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고 항쟁의 전 과정은 바로 이렇게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각성하고 조직적 힘을 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유월항쟁의 성공은 한국현대사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 지난 1997년 헌정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룩해 냈고 이로 인해 잃었던 민주주의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고 이태석 신부를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부른다. 이국 땅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 숨을 거두었으니 붙여준 형식적인 수식어가 아니다. 영화에는 이태석 신부가 톤즈의 배고픈 아이들, 밤낮 사흘간 걸어서 찾아온 환자들, 수단인 조차 외면하는 한센인을 바라보는 선한 시선과 해맑은 미소가 다시 떠오른다.

이 신부의 고향은 부산이다.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어릴 적, 집 근처의 성당은 그에게 놀이터였다. 거기서 벨기에 출신인 다미안(1840~1889) 신부에 대한 영화를 봤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근처 몰로카섬에서 한센인을 돌보다가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9세에 숨을 거둔 인물이다. 지난해 교황 베네딕토16세는 그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이 신부는 그 영화를 본 뒤 사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제 의대를 졸업한 그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그는 어머니께 “사제가 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신부가 된 형도, 수녀가 된 누이도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로 반대했다. “남의 아들은 (신부로) 가면 다 훌륭하고 거룩해 보이던데…, 왜 내 자식은 몇 명이나 데려가시냐?”고 반문했다. 그는 “어머니께 효도 못 하고, 벌어주지도 못 해서 미안하다. 그런데 하느님께 자꾸 끌리는 걸 어떡하느냐?”고 울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했다.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게 황폐해졌다. 특히 남수단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말라리아와 콜레라 등으로 약도, 치료도 없이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 신부는 남수단의 톤즈란 곳으로 갔다. 그는 톤즈에서 유일한 의사였다. 하루에 300명의 환자가 찾아왔다. 100㎞를 걸어서 밤에 문을 두드리는 환자도 있었다. “그곳에 가면 살 수 있다”는 소문이 톤즈에 퍼졌다.

공간이 모자랐다. 이 신부는 손수 벽돌을 구워서 병원을 지었다. 전기도 없었다.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해 냉장고를 돌렸다. 더운 날씨에 상하기 쉬운 백신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이 신부는 학교도 지었다. 초·중·고 11년 과정을 꾸렸다. 손수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다. 케냐에서 교사도 데려왔다. 톤즈의 아이들은 거기서 미래를 찾았다.

‘정서적 행복’ ‘영성적 행복’ ‘생리적 행복’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생리적 행복에만 목을 매고 치중한다. 정서적 행복, 영성적 행복은 사치인 양 안중에도 없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받친 ‘박종철 열사’ ‘이태석 신부’의 헌신이 윤석열 부패정권을 청산한 촛불이 다시 재점화 됐다.

헌정사상 탄핵 파면된 박근혜를 수사해 감옥소로 보낸 검사출신 윤석열 대통령은 김건희 치마폭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즉흥적 ‘계엄령’선포로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민중 항의로 6시간만에 철회하고 한남산성에 갇혀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尹은 김성훈 경호처 차장 등에게 ‘나를 체포하려 접근하는 경찰들을 총기 사용 등을 검토하라’는 자신의 지시가 경호처 내부 반발로 좌초하자, 그럼 칼이라도 들고 수사기관의 영장 집행을 막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치 尹은 조선시대 폭군 연산군처럼 尹 내외 생일 같은 날에 경호처 직원들에게 일종의 장기 자랑을 시켰다고 한다.

공수처는 국방부와 대통령경호처에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할 경우 특수공무집행방해죄 등으로 처벌될 수 있다는 경고성 공문을 보냈다. 처벌 받게 되면 공무원 연금 수령을 할 수 없게 된다. 경호처장은 공무원 연금을 받기 위해 사표를 내고 수사기관에 출두, 조사를 받고 있다,

경호처 4급 이상 간부들은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이 12일 오전 김성훈 경호처 차장(경호처장 직무대리)이 주재한 회의에서 집단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호처 내부에서 상급자에 대한 집단 반발이 터져 나온 것은 전례가 드문 일로, 공수처와 경찰의 2차 윤 대통령 체포 시도 과정에서 경호처 직원들이 영장 집행에 협조할 공산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

군부 쿠테다로 집권한 전두환을 존경하며 검찰 재직서부터 계엄을 말해왔던 尹, 실제로 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나 우리 민중은 군부독재를 자행해온 전두환을 권좌에서 끓어 내리는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를 다시 자치했으며 그후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인해 헌정사상 첫 탄핵, 파면으로 감옥소로 보낸 세계 유일 사상 분단국의 민주주의 꽃이다.

尹은 검찰을 동원, 쿠데타를 시도하려 했지만 민중의 촛불을 우습게 봤다가 한남산성을 피신중이다.

한남산성의 요새화는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국제 신뢰도를 끝없이 하락시킬 뿐이다.

윤, 빨리 오라를 받고 지은 죄를 달게 받아라!!

내란죄 우두머리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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