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사태가 전세계를 요동치고 있는 시점에 이미 북한은 지난 1993년 핵개발에 성공,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1년전에 북한은 핵실험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을 알아챈 클린턴 미대통령은 지난93년 더 이상 핵개발을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93년 11월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핵 폭탄 개발을 좌시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점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상원, 하원, 부시행정부에서 활약한 관리들은 북한의 핵 시설물에 대한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검토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클린턴 대통령의 공언이 있는 지 한달뒤 미정보부는 북한이 한두 개의 핵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를 클린턴 대통령에게 올렸다.
■북 1~2개 핵 이미 보유
클린턴 미대통령은 핵포기를 김일성주석에게 강력히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김일성주석은 미국의 말을 거부하고 핵실험을 단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일성주석이 말을 듣지 않자 평양을 공격할 채비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4년 1차 핵위기가 고조되면서 영변 핵시설 폭격론이 대두됐다. 그러자 김일성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그러나 김일성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1994년 7월8일 새벽2시에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이 사망에 대해서도 미스터리가 있다.
한반도는 갑작스럽게 충격과 불안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것도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불과 17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한반도 정세는 또 다시 요동쳤다.
■김정일, 핵 개발 원치 않았다
김일성 사후 외부에서는 그의 사망원인을 두고 갖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소문은 북한당국이 외국의 조의대표단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증폭됐다.
총살 등으로 시신을 공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이었다. 이런 짐작은 김일성의 시신이 공개되면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에 관한 갖가지 소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돌았다. ▲심장발작, ▲식량난으로 인한 쇼크, ▲김정일의 자극설 등.
김정일 자극설에 대해서는 미정보부의 개입설이 나돌았다. 김정일은 아버지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취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미 정보당국이 김정일의 후계구도를 보장해준다는 밀거래를 통해 김일성을 제거했다는 설이다.
이후 한반도 핵위기는 분단 이후 최초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호재를 타고 통일 열기로 반전됐다.
김정일 체제가 구축된후 사상초유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직접 방문하는등 북미 외교수립까지 가는 북미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
■김정일, 개발핵 대미협상용 이용중
그러나 부시미정부가 들어선후 북미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지금 북핵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한 부시 대통령은 핵에 대해 강공 드라이브를 펴면서 김정일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정일위원장은 이미 개발된 핵을 가지고 부시대통령과의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부시대통령은 이를 거부하고 개발된 핵을 폐기해야한 대화를 할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편 클린턴 미정부의 정책은 북한이 핵무기를 증강하지 못하도록 북한에 당근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을 철회시키거나 중단시키는 데 실패하였으며 이란의 핵개발에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우려는 상당 부분 세계적인 핵 확산추세에 대한 불안 심리에 그 뿌리가 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활동을 제약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고 만일 북한이 핵기술이나 핵무기를 수출할 경우 남아시아와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는 크게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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