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 여는 세상-윤석열정부,친일세력 득세➨“김준엽 OSS 대원 怒한다!”

능산선생 2023. 6. 7.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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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메일=편집인 김원섭]시대의 스승’ ‘살아있는 지성의 상징으로 불린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김 전 총장의 영결식과 안장식에는 각계 인사들이 참여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지난 2011610일 오전 8시 서울 안암동 고려대병원에서 열린 김 전 총장 영결식에는 이기택 4·19 혁명공로자회 회장과 김정배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병철 고려대 총장, 허빈 전 베이징대 부총장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김 이사장은 조사에서 끊임없이 고위관리 제의가 들어와도 사양하며 학문 세계를 지킨 인품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조국 통일 유훈은 후학의 몫이니 걱정 마시고 부디 영면하시길 빈다고 기원했다. 이 회장은 추모사에서 선생님은 살아만 계시는 것으로도 나라의 기둥이셨고 우리의 힘이고 자랑이었다. 선생님이 살아온 애국의 길, 정의의 길을 잊지 않고 따르겠다고 말했다.

1920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김 전 총장은 일제 때 학병으로 징집됐다.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에 편입된 김준엽, 장준하, 유일한등 학생들을 중심으로 특수공작교육을 실시, 이들을 국내에 투입하기로 했다. 미군들과 함께 미국전략정보기관(OSS)의 한반도진공계획에 따른 게릴라 훈련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19454월부터 이들은 중국의 시안과 푸양에서 훈련에 들어갔으나, 곧 이은 일제의 항복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광복군의 항일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태 평양전선의 전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연합국과의 군사합작 및 공동작전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일본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었음은 물론, 영국군이 대일작전을 수행하는데도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광복군 국내정진대가 비록 여의도 비행장에서 28시간 만에 돌아가고 말았지만 광복군이 당시 해외 독립운동세력 가운데 해방된 조국에 가장 먼저 진입했던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826월 김상협 총장이 임기 만료를 두달 앞두고 국무총리로 취임하자, 그 뒤를 이어 김준엽 교수가 제9대 총장에 오른다.

광복군 출신의 강직한 학자 김준엽이 총장생활 하루를 보내보니 이 분위기에서 4년 임기를 채우기 힘들겠다는 판단했다. 취임 후 김 총장이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총장 비서실에 진을 치고 앉아 온갖 간섭과 협박을 일삼던 기관원들을 쫒아낸 일이다.

19841114일 오후 4시 반경, 고려대·연대·성대·서울대 학생 264명이 관훈동에 있는 민정당 중앙당사에 진입해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본관 9층 소회의실을 점거한 채 총학생회 인정, 문교부장관 문책, 노동자 권익 옹호 등 14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민정당 대표와의 자유토론을 요구했다.

그러자 경찰은 다음날 새벽 5시경 문과 벽을 부수고 최루탄을 쏘면서 난입해 학생들 전원을 연행했다. 이 가운데 고려대 학생은 81명에 달했다.

김준엽 총장은 긴급 교무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경찰조사와 검찰신문이 끝난 뒤 법원의 판결이 나면 학칙에 따라 적절히 처리한다"는 원칙을 재천명했다.

나흘 후 권이혁 문교부장관이 김 총장과 서울대, 연대, 성대 총장을 플라자 호텔로 불렀다. 객실에 앉자마자 총장들에게 프린트물을 나눠줬다.

김 총장이 받은 종이에는 81명의 학생 명단이 적혀 있었고, 각 학생마다 죄상과 함께 학업성적처럼 A, B, C, D식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권이혁 문교부장관은 이 가운데 죄질이 나쁜 111명을 다음날 아침 9시 반까지 제적하라고 윽박질렀다.

격분한 김준엽 총장은 나는 제적 못 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제적이 되든, 퇴학이 되든, 나는 경찰조사와 검찰조사가 끝난 후 정식으로 재판을 받은 뒤에 그 판결을 토대로 우리 학칙에 비추어 적절하게 처리하겠다고 통보했다.

권 장관과 김 총장의 격론이 벌어졌다. 누군가 김 총장에게 식사를 하시라고 권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 총장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아이들을 사형집행하라는데 밥이 먹히는가?”

이 회동 이후에도 문교부나 기관원들은 학생들을 제적시키라고 총장이나 학생처장에게 독촉하고 협박했다.

고민에 빠진 김 총장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민정당 실력자인 이종찬 원내총무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이 의원은 독립투사인 이회영. 이시영 일가의 종손으로 광복군 출신인 김 총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

김 총장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은 이 의원은 김 총장의 말이 옳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김 총장은 피해자인 민정당이 행정부에 학생들의 처벌을 관대하게 해달라고 하고, 학생들의 처벌을 대학의 자율에 맡기라고만 해달라. 또 문교부의 압력이 너무 심하니 민정당이 합의하면 문교부에 그렇게 요청해달라고 당부했다.

다행히 민정당은 처벌이나 징계보다는 선도하는 차원에서 처리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보안사, 안기부, 치안본부, 시경, 성북경찰서, 문교부 감시원으로 구성된 이들 기관원들은 총장실에 죽치고 앉아 학교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이들 때문에 결재를 받으러 온 교수들이 앉을 자리도 없었고, 이들을 접대하느라 학생들의 등록금이 유용되고 있었다.

1974년 봄, 김준엽 교수의 동양최근세사 강의실, 교실에 모인 학생들은 약간 들뜬 기분으로 김 교수를 기다렸다. 마침내 김 교수가 나타나자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날 아침 조간신문에 김 교수가 통일원장관 입각 요청을 거절했다는 기사가 난 것이었다. 이것이 당시 유신시대의 민심이었다. 촉망받던 지식인이 어느 날 갑자기 유신독재정권에 발탁돼 고관이 되는 세태에 실망하던 차에 김 교수의 장관직 거절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6월항쟁 끝에 6.29선언이 나오고 대통령 직선이 실시됐다. 대선을 앞두고 먼저 김영삼 후보측이 학문에 몰두하던 김준엽 전 총장 영입에 나섰다. 김영삼 총재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김 전 총장을 국무총리 자리에 앉힐 계획이니 선거대책본부장으로 들어와 나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계나 관계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김준엽의 결심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이번에는 김대중 후보측에서 사람을 보내 제안을 했다. “평화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들어와 대선을 돕다가 김 총재가 대통령이 되면 국무총리에 임명한다는 것이 총재의 구상입니다

김준엽은 김영삼 후보에게 밝힌대로 절대 공직을 맡을 생각이 없고, 지금이라도 야당후보 단일화에 힘을 쏟으라고 당부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이번에는 노태우 당선자가 만나자고 해서 안가를 방문했다.

훗날 김준엽 총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노태우 당선자에게 내가 국무총리를 사양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새 헌법에 따라 전두환 씨가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는다는데 총칼로 정권을 장악하고 많은 사람을 괴롭힌 그에게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숙일 수 없고,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자에게 투표한 내가 총리가 되면 야당을 지지한 66%의 국민의 뜻에 어긋나게 되며,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그 스승이라는 자가 총리가 될 수 없으며,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거리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김준엽은 끝내 벼슬이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학자의 길을 고수한다.

졸업식을 앞두고 김준엽 총장이 전두환 정권의 압력 때문에 사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고려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날은 김 총장이 고대를 떠나기 전 마지막 공식행사인 졸업식이 예정돼 있었다.

교기를 앞세우고 김 총장과 이사장, 교무위원, 내빈 순으로 줄을 이어 운동장으로 내려가는데 학생들이 총장님~ 기운 내세요”, “총장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총장님 만세~”라고 외쳤다.

피켓을 든 학생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졸업생들 앞의 차가운 땅바닥에 열을 지어 주저앉았다.

피켓에는 총장사퇴 결사반대! 학원자유 침탈 즉각 중지하라!”, “10만 고대인의 피끓는 의지로 대학의 관제화를 분쇄하자!”, “고대인의 손으로 고대정신 수호하자!”, “굴욕적인 총장사퇴 결사반대!”, “사학에의 관권개입 즉각 중단하라!”, “굴욕적인 총장사퇴 결사 반대!”, “문교부 너 학원을 도구화하려는가?” 등의 구호가 써있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김 총장이 본관에 있는 총장실로 들어가자 수백명의 학생들이 따라와 건물 앞에서 광복군 노래를 합창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3천리 3천만의 우리 동포를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갑세다

젊은 날 광복군에서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운 김준엽 총장을 격려하기 위해 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때부터 한 달간 고려대 교정과 학교 앞은 개교 이래 최대 최장의 시위가 벌어졌다.

다른 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잘리고 고려대만 총장이 잘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학내외 전 구성원이 들고 일어났다.

학생들은 모든 수업을 거부하고 연일 시위를 벌였다. 시위에는 학생들 뿐 아니라 젊은 교수, 교직원, 기숙사 수위와 그가 키우는 강아지까지 가세했다. 당시 시위는 대개 학생들이 쫒겨다니는 양상이었는데, 이때는 5천 명이 넘는 고대생들에게 경찰이 밀려 연신 교문이 뚫리기 일쑤였다. 경찰이나 고려대 재단측은 시위가 3, 4일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작고하신지 오늘(7)12주기를 맞는다.

한국 사학의 쌍벽인 연세대 교수를 역임한 윤기중 명예교수,

국교정상화 이후 67년 일본문부성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유학파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 윤석열 대통령은 어렸을 때부터 일본은 문명국, 조선은 미개국이라 배웠을 것이고, 그 왜곡된 역사관이 지금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실제로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와 일본에 가 우수한 문명을 경험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윤석열이 최근 배타적 민족주의·반일로 정치적 이득 취하는 세력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도 어렸을 때부터 머리에 박힌 식민사관 때문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한국 대법원이 판결한 것을 뒤집고 강제 징용자 배상을 우리 기업이 하게 했고, 일본에는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배출까지 눈감아 주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세계지도를 거꾸로 해서 한반도를 보면 안다. 우리가 도약할 기반은 바다라는 무장 평화론을 위정자들이 행동으로 실행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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