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 여는 세상-‘세계 사회정의의 날’➨전두환‘정의사회구현’Again!!

능산선생 2024. 2. 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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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메일=편집인 김원섭]사회정의를 모든이가 완벽하게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가장 빈곤한 사람들의 복지를 우선 배려하고, 불평등한 결과는 존재하지만 기회만큼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주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는 이렇게 말했다.

220일은 빈곤과 실업을 퇴치하고 균형 잡히며 안정적인 사회를 이루고자 제정된 기념일 세계 사회정의의 날이다. 1995년 발표된 코펜하겐 선언의 정신을 이어, 2007년 유엔 총회에서 기념일로 채택되었다. 완전고용을 달성하고 사회적 통합을 지원한다는 목적을 갖고 각종 활동이 진행된다.

유엔과 국제노동사무소를 포함한 많은 단체들이 사회 정의의 중요성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며, 빈곤과 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 계획을 제안한다. 학교에서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나 실업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해당 시기에 발생한 전 세계의 사례를 들어 토론회를 열기도 한다.

20여 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사회의 보수화는 많은 문제를 낳았다. 이른바 체제 변화를 경험한 2017년부터 대중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 개인의 출세가 아니라 공동체가, 정치 혐오가 아니라 정치 참여가, 자기비하로 인한 우울이 아니라 극복을 통해 사회로 복귀하는 애도 작업이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본 분노한 대중은 지난 2016년 촛불에서 보여주듯이 각성된 시민으로 거듭났다.

대한민국의 20대는 픽미세대’ ‘나를 선택하라는 간절함을 품고 사는 세대. 단군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췄지만 선택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 고단한 세대다.

그래서 2030세대는 다른 어떤 가치보다 공정(公正)’을 중시 한다.

그러나 공정과 상식을 국정과제로 발표한 윤석열 정부는 소위 힘 센 사람들의 반칙.갑질 시비에 이어져 이제 공정과 상식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끄러운 단어가 되어버렸다.

대통령과 주변의 권력의 사유화와 국정농단이 이어지는 가운데 대통령의 권력기관 줄세우기와 여당의 사당화, 대통령과 여당의 공적의지(public mind) 상실과 갈라치기가 만연되고 있다. 여기에 시대착오적 극우 행보, 권위주의적이고 소통이 안되는 국정운영, 주권자인 국민을 무시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통치행태, 시대착오적 경제정책과 외교전략 등등 박근혜 정권 때보다 그 양상은 훨씬 더 심각해졌다고 한다.

선량한 얼굴로 위장한 분배·복지·환경·교육 민주화 구호의 선동 뒤에 숨은 거짓 정책들이 청년실업 급증, 40·50대 가장의 실직, 소상공인·자영업자의 파산, 기업의 해외탈출, 수출·투자의 급감, 교육의 파산을 가져오고 있다. 사상 최대의 예산지출과 국채 발행은 대한민국의 미래까지 격침시키고 있다.

여기에 江富者를 위한 정책으로 나라 곳간이 텅텅 비어가는 상태이어서 곳간을 채우기 위해서 민중의 호주머니를 탈탈 털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민중의 애호품인 담배, 소주, 막걸리 값을 올릴 수 밖에 없다.

일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소득을 보전하더라도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는다. 특히 근 3년간 지속되었던 중국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허리인 중산층이 사라졌고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이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물론 분노는 한 사회의 건강함을 포착할 수 있는 일조의 도덕적 바로미터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다. 그래서 플라톤은 분노는 정의를 향한 영혼 능력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분노를 잘 요리하는 주방장이 지금 필요하다. 그러나 검찰출신 대통령은 스스로 그토록 비판하던 제왕적 대통령이 되어 3(입법, 사법, 행정)위에 군림하고 있다. 입법부인 국회를 하명기관으로 만들고, 사법부와 헌법재판소를 검찰출신 인사로 채워 3권간의 견제와 균형의 틀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우리사회의 공감능력은 낮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으로써 정의를 공감이라고 했다. 공감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의 입장이 되어 그 감정을 자기 일처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개인의 삶에서든 공적 활동에서든 아무리 이성적 판단을 해야 할 때라도 공감을 바탕으로 한 도덕적 판단이 발휘되어야 사회가 제대로 돌아 갈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적은 그것을 직접적 목적으로 삼지 않을 때만 얻어질 수 있다. 자신의 행복이 아닌 다른 목표에 마음을 집중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 행복은 따라온다. 당신 스스로에게 행복한가를 묻게 되면 행복은 사라진다고 한다.

나라가 정의의 길에 미치지 못하면 국민이 행복할 수 없다. ‘의 고른 분배가 경제적 관점에서 정의이다. 공자는 흙수저 제자의 등을 다독이고 쌀독이 빈 제자에게 온정의 손길을 베푸는 방식으로 분배의 정의를 구현했다.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의 기준을 배부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보다 굶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에 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정의는 토마스 모어나 칼 마르크스가 말하는 정의 보다는 빅토르 위고가 에서 말하는 정의에 더 가깝다. 빅토르 위고는 훌륭한 분배란 평등한 분배가 아니라 공평한 분배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수자와 다수자, 부자와 빈자, 귀족과 평민이 각자의 이익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혼합형 정치를 가장 이상적인 정체로 보았다. 가장 아름다운 정의의 얼굴은 바로 공존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 사회정의의 날’, 80년대 전두환 군부정권의 정의사회구현이 환생한다.

삼청교육대 사건은 198084일 계엄 포고 제13호에 의해 검거된 6755명 중 4만명을 군부대 내 삼청교육대에 보내면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이다. 교육 대상자 검거와 수용 과정에서 불법 구금과 구타를 비롯한 가혹행위 등이 발생했다.

이 아닌 으로 民衆을 짓밟고 있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분노한 자들의 노래(Do you hear the people sing? singing a song of angry men)”410일 예고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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