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일=편집인 김원섭】「‘12월 12일’은 주인공이 현해탄을 넘어 이국의 탐험을 시작하는 날이자, 10여년의 이국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하는 날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적빈에서 벗어나 유산자의 신분으로 재생의지를 불태우면서 고향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복원하고자 하지만 결국 그 꿈이 산산조각나고 구제받지 못한 한 인간의 정신적 패배를 기록한 날이기도 하다. 따라서 ‘12월 12일’의 표층적 의미는 바로 인생에 대한 절규이며 원점으로 회귀하는 숙명적인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소설가 이상이 20세 때(1930년) 쓴 처녀작 중편소설〈12월12일>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공포와 불안의 영원한 도주를 멈출 수 없는 추방된 자의 불행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로부터 49년이 지난 12·12 군사 반란(12·12 軍事 反亂)이 일어나 한국의 민주주의를 다시 후퇴시켰다.
1979년 12월12일 밤,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있는 특전사령부. 2층 집무실에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그는 휘하 부대에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12월13일 0시30분, 중무장한 군인 10여 명이 사령관실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왔다. 맨 앞에 선 이는 12·12 쿠데타에 가담한 특전사 3여단(최세창 여단장) 휘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이었다. 이들은 사령관실에 붙은 비서실로 밀고 들어갔다. 10여 분간 콩 볶는 듯한 M16 소총 소리가 건물을 뒤흔들었다. 12월12일 오후 6시30분 한남동에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울린 총성이 쿠데타의 서막이었다면, 특전사령부에서 울린 총소리는 쿠데타 완료를 알렸다.
필자는 그날 약수동에서 하숙하며 대학에 다녔는데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공관이 있는 한남동에서 울러퍼지는 총소리를 들었으며 약수동에서 제 3 한강교(현재 한남대표)는 통제돼 아수라백작이 되었다.
반란군들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정병주 사령관을 끌어내 군용 지프차에 실었다. 이어서 시신 한 구가 실려 나왔다. 정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1990년 중령 추서)이다. 그는 쿠데타를 온몸으로 막아내다 정병주 사령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여섯 발을 맞고 쓰러졌다. 당시 나이는 35세였다.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는 곧바로 “12·12 사태 와중에 총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라고 발표했다.
1989년 3월 경기도의 어는 군부대의 숙영지 산기슭에서 한통의 유서도도 남기지 않고 목을 매 숨진 시체로 발견된 고 정병주 장군은 바로 12.12 군사반란에서 부하들의 배반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불우한 나날을 보내며, 오직 12.12 사태에 대한 증언의 기회를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1988년 10월 중순 평소와 다름없이 집을 나간뒤 5개월만에 불귀의 객이 되어 발견됨으로써 많은 의문점을 던져 주었다.
지난 1979년 12월12일에 있었던 군부들 간의 총격사건은 전두환과 하나회의 군인들에 의해 벌어진 군사반란 사건이었다.
국방부와 주한미군사령부는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 한 채 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5.18 항쟁’을 불러오는 기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전두환을 존경한다는 윤석열 대통령, 45년만에 계엄령을 선포했다가 6시간만에 철회하는 국제적 망신을 주면서 미국을 비롯한 우방들이 등을 돌려 신뢰도에도 금갔다.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국민의힘 안에서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친한동훈계 의원 일부가 표결 참여 의사를 밝힌 데 이어, 10일 국회 본회의에선 비상계엄 상설특검과 윤 대통령 신속체포 결의안에 대한 국민의힘 의원들의 찬성표가 속출했다.
전두환이 극소수 정치 군인을 권력의 핵심으로 삼았던 것처럼, 尹은 극소수 정치검사를 권 핵심에 기용해 권력을 운용해왔다.
그러나 전두환은 물리적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고문하고 죽였지만 尹은 기껏해야 검찰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괴롭힐 뿐이다. 그런 것만 가지고는 민중의 저항을 억누르지 못한다. 尹은 전두환만큼 기괴하지만, 힘과 능력은 전두환에 닿지 못한다.
지금 尹은 빼도 나갈 수 없는 쥐구멍 상태다.
내려놓을 때 내려놓은 것이 상책이다.
훌라송은 ‘오월 광주’와 공감대가 큰 노래다. 단순한 선율에 원하는 내용을 가사로 붙이면 묘한 비장함을 불러온다. 1980년 5월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무서움을 떨쳐내고 손을 잡고 저항했다. 원래 아일랜드 민요였던 이 노래는 미국 남북전쟁 때 ‘조니가 집으로 행진해 올 때’로 바뀌어 불렸다. 한국에선 1970년대 대학생들의 집회 현장에 처음 등장했다. 1980년 5월15일 대학생과 시민 10만 여명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모였다가 퇴각한 ‘서울역 회군’ 때도 불렸다.
우리는 윤석열 탄핵을 원하는 지금 1970~80년대 대학가에서 불리던 ‘훌라송’ 가락에 맞춰 “윤석열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훌라~훌라~~”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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