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 여는 세상-41년만 還生될 뻔‘통금’ 민중이 막았다!!➼‘이브의 경고’

능산선생 2024. 12. 24.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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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메일=편집인 김원섭】“월광. 됐으니까 너 그만 가봐

경희. 넌 어디로 갈건데?

월광. 어디 가긴 집에 가야지

경희. 미쳤어? 너 지금 가면 잡혀 지금 군사들 깔렸다고 잠시 어디 숨어있거나

그래 아는사람한테 도와달라고 그래 어?

월광. 아는 사람?”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밤 9시부터 새벽 5시까지의 통행금지 시간에 순찰을 돌며 귀신을 잡던 방범 순찰대인 '야경꾼'의 이야기를 다룬 2014년 8월에 방영된 MBC드라마 ‘야경꾼 일지’의 대사다.

범죄 따위를 예방하기 위해 밤에 경계나 순찰을 돌던 사람, 옛날에는 딱따기를 두드리며 동네 어귀를 돌던 야경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도입된 야간통행금지, 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은 종루에서 밤 10시경에 울리는 28번의 인정(人定)소리에 맞추어 닫히고, 새벽 4시경에 울리는 33번의 파루(罷漏)소리에 맞추어 열렸다. 그러다가 해방후 미 군정이 시작되던 1945년 9월 7일 서울ㆍ인천 등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가 1950년 6ㆍ25전쟁 이후로는 전국적으로 실시되게 됐다.

50대의 추억, 밤 12시가 되면 '애~앵~' 하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서대문 로터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놓이고, 골목에는 2인 1조 야경꾼들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며 '통금!'이라고 길게 소리친다. 술꾼들은 여관으로 옮겨 술자리를 이어가거나 아예 술집 문을 닫고 안에서 밤새도록 마셨다. 짧게 마시고 빨리 취해야 한다. 그래서 여인숙, 여관들이 성행하며 귀가 못한 청춘남녀들은 그곳에서 머물면서 ‘통행금지 베이붐’도 일기도 했다.

통금에 걸리면 파출소를 거쳐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문다. 통금에 걸린 아들을 벌금 내고 풀어준 뒤 아들에게 두부를 먹이는 웃지 못할 장면이 벌어지기도 했던 그 시절이다. 술을 좋아하는 필자도 통금에 걸리는 것을 피해 친구들과 여관으로 직행, 술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성탄절 전야와 12월 31일 제야(除夜)에는 통금이 해제되어 간만에 밤을 온전하게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82년 1월 5일 전두환 정부 시기 3S정책의 일환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이 영향으로 당시 사람들이 1시에 길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 여기에 신정 연휴까지 겹치면서 실질적으로 마지막 통금은 1981년 12월 31일까지였다.

지난 1982년 1월 6일 0시를 기해 전두환 대통령이 일부 전방 및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내려졌던 통행금지를 해제 한다고 발표하면서 통행금지는 역사 속으로 묻혔다.

그러나 전두환을 존경한다는 윤석열, 그놈의 계엄령 선포 때문에 41년만에 통행금지가 다시 환생, 민중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다. 하마터면 박정희 군사정권때도 통금을 해제했던 성탄절 전야도 통금 속에서 맞아야 할 뻔 했었다.

그러나 민중은 6시간만에 尹을 끓어 내리고 24시간의 자유를 지켰다.

‘12·3 비상계엄’을 주도한 혐의를 받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전 국민의 야간 통행을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했었다. 尹에게 보고했던 계엄사령부 제1호 포고령 초안에는 구체적인 시간을 정하지 않은 채 ‘야간 통행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김 전 장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다음 날인 1979년 10월 27일 발령된 ‘포고문’ 등을 참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야간 통행금지는 22:00부터 익일 04:00까지로 한다’는 조항이 있다.

한 방송사의 대통령 긴급 담화 영상에 ‘오후 11시 이후 통행 시 불시검문·체포’라는 자막을 입힌 뉴스 속보 사진도 SNS에서 확산됐다.

야간 통행금지는 1982년 1월 폐지된 상태다.

독재정권 시절 성탄절 전야는 통금해제로 레스토랑과 다방에 시민들이 넘쳐났다. 전파사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을 들으며 서울 명동은 발 디딜 수 없는 인파가 人山人海였다.

조선시대에 도입된 야간통행금지, 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은 종루에서 밤 10시경에 울리는 28번의 인정(人定)소리에 맞추어 닫히고, 새벽 4시경에 울리는 33번의 파루(罷漏)소리에 맞추어 열렸다. 그러다가 해방후 미 군정이 시작되던 1945년 9월 7일 서울ㆍ인천 등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가 1950년 6ㆍ25전쟁 이후로는 전국적으로 실시되게 됐다.

60대의 추억, 밤 12시가 되면 '애~앵~' 하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서대문 로터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놓이고, 골목에는 2인 1조 야경꾼들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며 '통금!'이라고 길게 소리친다. 술꾼들은 여관으로 옮겨 술자리를 이어가거나 아예 술집 문을 닫고 안에서 밤새도록 마셨다. 짧게 마시고 빨리 취해야 한다. 그래서 여인숙, 여관들이 성행하며 귀가 못한 청춘남녀들은 그곳에서 머물면서 ‘통행금지 베이붐’도 일기도 했다.

통금에 걸리면 파출소를 거쳐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문다. 통금에 걸린 아들을 벌금 내고 풀어준 뒤 아들에게 두부를 먹이는 웃지 못할 장면이 벌어지기도 했던 그 시절이다. 그러나 성탄절 전야와 12월 31일 제야(除夜)에는 통금이 해제되어 간만에 밤을 온전하게 만끽할 수 있었다.

지난 1982년 1월 6일 0시를 기해 전두환 대통령이 일부 전방 및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내려졌던 통행금지를 해제 한다고 발표하면서 통행금지는 역사 속으로 묻혔다.

전두환을 존경한다는 尹, 41년만에 全이 폐지한 ‘통금’을 환생시키려고 했다니 민중을 卒로 보는 행위로 날아가는 새도 웃는다!!

尹, 한남동 집에서 박미경의 ‘이브의 경고’를 들려준다!!

「오늘도 넌 나를 피해 딴 생각을 하지만 난 알고 있어

나의 예감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어 걱정스런 맘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있다면 나에게 더 이상 실수하지 마

내게도 너 아닌 멋진 남자가 가끔 날 유혹해 흔들릴 때도 있어

너에게만 있는 능력처럼 그렇게 날 속이려고 하면

나에게는 더 이상 순애보는 없어 난 널 그냥 떠나버릴 거야 워

나에게 실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어

나의 호기심이 잠시 날 흔들리게 했을 뿐

너에게 구차한 변명 따윈 하지 않을게

이젠 날 이해해 줘 내 잘못을 인정할테니

이제는 알 것 같아 숨겨진 너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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